그 여름에 읽은 책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못 박아 놓고들 있지만
사실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한 계절이다.
날씨가 너무 청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엷어가는 수목의 그림자가 우리들을
먼 나그네 길로 자꾸만 불러내기 때문이다.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서 책장이나 뒤적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고리타분하다. 그것은 가을 날씨에 대한 실례다.
그리고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도 우습다.
아무 때고 읽으면 그때가 곧 독서의 계절이지. 여름엔
무더워서 바깥일을 할 수 없으니 책이나 읽는 것이다.
가벼운 속옷 바람으로 돗자리를 내다 깔고
죽침이라도 있으면 제격일 것이다.
수고롭게 찾아 나설 것 없이 출렁거리는 바다와
계곡이 흐르는 산을 내 곁으로 초대하면 된다.

8, 9년 전이던가, 해인사 소소산방에서
'화엄경 십회향품'을 독송하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잊은 채 지낸 적이 있다.
저녁 공양 한 시간쯤 앞두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가사 장삼에 땀이 흠뻑 배고 깔았던 방석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비로소 덥다는 분별이 고개를 든다.
골짜기로 나가 훨훨 벗어젖히고 시냇물에 잠긴다.
이내 더위가 가시고 심신이 날듯이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해서 그래 여름 '심회향품'을 10여 회
독송했는데 읽을수록 새롭고 절절했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우러나서 한 일이라 환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

무소유
(
법정 저 | 범우사)
Posted by 아카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