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아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왔다.
그녀는 소리 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 쪽으로 갔다.
인기척에 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큰일 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얘야, 세상에! 부엌이 없는 곳이 어디 있니?
어디나 부엌은 있지. 저기 보렴.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비스듬히 열렸잖니?"
"저긴 부엌이 아니에요. 복도예요."
"그래? 언제 부엌이 복도가 되었단 말이냐?
밥하던 여자들은 다 어딜 가구?"
"밖으로 나갔어요.
엄마, 밥 따윈 이제 아무도 안 해요.
보세요, 저기 줄줄이 걸어 나가는 여자들을요."
"얘야, 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정말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된장 끓이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엄마 제발 정신 차리세요. 여긴 병원이란 말예요."
"계집애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게 아니란다.
아버지 화나시겠다. 어여 밥하러 가자.
아이구 얘야, 숨이 이렇게 차서 어떻게 밥을 하니?
(모기만 한 소리로) 누가 부엌으로 가는 길에
저렇게 긴 복도를 만들었을까?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오래 걸어 부엌으로 갈까?'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까무러쳐서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
『상자들』
(이경림 저 | 랜덤하우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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