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ner




기획의 글

돌이켜 보면 책만큼 항상 곁에 있는 것도 없습니다. 머리털이 나고나면 어떤 경로로든, 어떤 종류든 우리는 책을 만나게 되지요. 우리가 글자를 뭘로 깨쳤겠습니까. 먼 기억이라 제목은 생각나지 않더라도 아마 분명히 어떤 책으로부터였을 것입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요. 글자를 깨치고 나면 바야흐로 책이 일상이 되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의무교육기간 동안 우리는 책을 메고 펼치고 찢고 잃어버리고 풀고 매기고 사고 팔고 하며 내내 자라지 않았던가요. 의무교육기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지요. 문제집이나 교과서에서 재테크서나 자기계발서로 그 종류만 바뀔 뿐.

거짓말 같으면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는 여러분의 주위에 책이 존재하는 지 존재하지 않는 지를. 읽은 책이든, 읽지 않은 책이든, 여러분이 장만한 책이든 선물받은 책이든, 분명히 여러분의 반경 10m 안에 책은 존재할 겁니다.

문제는, 책의 이 일상성이 우리가 원한 것이었던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학교 다닐 땐 없으면 혼나니까 갖고 다녔고, 직장에 들어와선 들고 다니지 않으면 왠지 폼이 나지 않는 것 같아서 들고 다녔을 뿐입니다. 우리 쪽에서 그 책을 절실히 원했다기보다는 그게 없으면 뒤쳐지니까 마지못해 책과 함께 살았던 거죠.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입시지옥, 그 지옥의 2탄인 취업지옥을 거쳐오며 우리는 책이 주는 즐거움을 맛보기 전에 책에 대한 거부감부터 배운 겁니다. 그래서 이 '마지못해'의 지옥이 끝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책에 단죄를 내리는 일인 거지요. 수능이 끝나고나서 그 지긋지긋했던 '책'들을 창밖으로 던지며 해방감을 느끼던 기억, 여러분에게는 없나요?

이쯤되면 억울할 만도 합니다. 책 말입니다. 책에 죄가 있다면 뭐겠습니까. 죄가 있다면 그건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책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이 나라의 몰지각한 교육제도나 야만적인 사회시스템이겠죠.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있고 좋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있는 이 나라에서, 그 좋은 것들을 담은 그릇인 책들이 푸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푸대접하는 만큼 우리만 '괜히' 손해를 보는 거죠!

따져보면 책이 뭔 좋은 대접을 바라겠습니까. 읽어달라는 거 외에 말입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쓴 지혜를 내가 담고 있으니, 내게 돌을 던지기 전에 제발 한번은 읽어봐달라, 이거 말입니다. 읽어보고 좋으면 소중히 다루겠지요. 나쁘면 함부로 하던 말던 그건 읽는 사람 마음이구요. 라면 받침으로 쓰이든, 뜯어서 도배를 하든, 한번 펼쳐서 사람에게 읽힌 책은 여한이 없을 겁니다. 종이가 귀해서(물론 지금도 종이는 엄청! 귀합니다만) 책이면 무조건 숭앙하고 귀애하던 시대는 애저녁에 지나지 않았습니까. 잘 포장해서 볕 안드는 거실 책장에 고히 꽂아둔 책들보다,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더라도 두루 읽히는 책들이 훨씬 행복할 겁니다. 그리고,

책이 행복하면 쓰는 이나 읽는 이도 두루두루 행복해질 건 뻔하지요. 신나서 쓰고 재미있어서 더 읽을 테니까요. 그래서, 책이 행복한 나라의 미래는 무조건 행복할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책은 생활입니다. 우리 곁에 있습니다. 괜히 책이 어렵거나, 괜히 책이 싫은 분들은 먼저 책과 친해져보세요. 굴러다니는 책 한 권 집어들고, 저 동영상을 거울 삼아 뭐든 해보세요. 여러 권이 있다면 도미노를 해보셔도 좋고, 한 권 밖에 없다면 마우스패드로 써보세요. 거리감을 좁히고 나면 그 책의 속마음이 궁금해질 겁니다. 연애랑 똑같지요. 그리고 연애가 시작되면 연락주세요. 사람과 달라서 책은 둘이 만나도 상관 없답니다.

끝내주지요?
Posted by 아카리아
: